자기증여의 전형, 남녀의 혼인적 사랑
이윤이 에스텔 수녀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전교 수녀회)
* 본 글은 2022년 전국교사모임 및 재교육의 강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한 편에서는 혼인을 시대에 뒤떨어진 그저 낡고 고루한 제도로, 다른 편에서는 어떤 형태의 결합이든 남녀의 혼인과 동등한 자격을 요구하는 시대에, 우리는 ‘한 남자의 남성성과 한 여자의 여성성을 토대로 하는 지속적이고 전적인 결합인 혼인적 사랑’을 하느님의 존재 방식을 드러내는 자기증여의 전형으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1. 남자와 여자, 하느님 모상을 드러내는 자리
우리가 성(sexuality)의 기원과 목적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누구인지, 인간이 무엇으로 부르심 받았는지, 무엇을 통해 자신을 온전히 실현하는지, 어째서 인간이 하느님을 닮은 존재인지를 정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의 「향연」에서는 인간 성(性)의 기원을 자웅동체인 ‘안드로진 신화’를 통해 설명합니다. 신의 권한에 함부로 도전한 것에 대한 벌의 결과로 서로 갈라지게 된 그들이 저마다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헤매게 된 것을 남자와 여자가 본성적으로 서로 끌리고 갈망하는 에로스(사랑)의 기원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남녀의 성적 상이성은 무언가 부정적인 것, 곧 불완전, 부족과 결핍을 가리킵니다. 그들에게 성은 자신의 의지나 자유로 어쩌지 못하는 ‘문제’가 되어버리고, 그 결과 인간은 성적 욕구에 지배되는 그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존재로 정의됩니다. 성을 이렇게 이해하게 되면, 본래 선하고 아름답고 영원한 것을 향한 갈망이었던 에로스(eros)가 몰락합니다. 에로스는 그저 성적 결합을 위한 욕구나 충동으로 축소되고, 사랑은 성관계의 권리나 의무로 등치되며, 나와 성적으로 다른 타자는 그저 내 결핍을 채우는 데 필요한 대상이나 수단이 되어버립니다. 뿐만 아니라, 성의 목적은 다른 이와의 결합 그 자체에 머물게 됨으로써, 성의 본질인 생명출산능력은 처음부터 그 자리를 잃게 됩니다.
반면, 창세기가 전하는 인간 창조 이야기에서는 성의 기원과 목적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 1,27)는 말씀은 우리 인간 존재의 객관적 존엄인 ‘하느님의 모상됨’을 분명하게 확인해 줍니다. 곧 남자와 여자가 각자의 고유하고 구분되는 특질들에도 불구하고, 둘 모두 하느님 모습대로 창조된 존재로서 동일한 존엄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남자와 여자는 그들 존재만이 아니라, ‘그들이 서로 관계를 맺는 방식’ 안에서도 하느님을 닮았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성의 상이성은 하느님 창조의 결과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특별한 존재 방식인 것입니다.
창세기 2장의 두 번째 인간 창조 이야기에서는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에서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하는 사람(아담)이 체험한 고독에 주목합니다. 그 고독은 “한 인격 곁에 한 인격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도움”의 부재와 인격들의 친교에 대한 갈망을 가리킵니다. 이는 인간의 성이 생물학적 본성뿐만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인 인격적 차원으로 격상되고, 남자와 여자의 상호보완적인 몸(남성성-여성성)이 서로에게 선물이 됨으로써 상호적 자기증여의 사랑을 표현하는 자리가 됨을 말해줍니다.
우리 각자는 그 자체로 온전하고 자율성을 지닌 인격(페르소나), 그 누구로도 대체되거나 반복될 수 없는 유일한 한 사람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이루는 ‘한 몸’은 두 명의 고유한 인격의 결합이지, 결핍된 반쪽이의 결합이 아닙니다. 비록 성적인 다름에서 생겨나는 본성적인 끌림은 우리의 본질적 불완전성과 나약함을 드러내지만, 이것은 단지 부정적인 의미를 넘어 우리 전재의 근원적인 관계성을 깨닫게 만들며, 어떤 분명한 삶의 방식으로 우리를 인도해 줍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향해, 누군가를 위해 있는 관계적 존재이며, 타인과 ‘함께’ 살 뿐만 아니라, 타인을 ‘위해’ 사는 삶으로 초대되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실상 우리의 성적인 몸 자체가 우리가 누구인지 말해줍니다. 우리는 상대방에게 자신을 내어주어야만 의미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남성성-여성성은 근원적 방식으로 체험된 선물의 원초적인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성은 해소하고 분출하는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창조주의 사랑을 반영하는 상호적 자기증여의 자리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존재방식인 ‘전적인 자기증여’를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자신의 남성성-여성성을 바탕으로 전적인 상호증여를 통해 실현함으로써 하느님의 모상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윤리를 이해할 때, 남녀 한 몸의 일치가 하느님 사랑의 분명한 표지라는 사실을 분리하고 생각할 수 없게 됩니다. 가톨릭교회가 모든 형태의 혼외 관계, 생명에 개방되지 않은 성관계에 ‘NO’하는 것은, 바로 약속 없는 성관계, 증여(선물)없는 성관계에 ‘NO’하는 것입니다.
2.자기증여의 전형,남녀의 혼인적 사랑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성을 통해 모든 진실을 담아 자신을 전적으로 주는 행위가 가능한 자리는 오직 자유롭고 의식적으로 선택된 부부사랑의 서약인 혼인뿐입니다.”(성 요한 바오로 2세 「가정공동체」 11항) 부부의 결합은 성을 통해 사랑으로 배우자에게 자신을 전적으로 내어주는 고유하고 특별한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남녀의 혼인적 사랑이 하느님 모상을 드러내는 참된 자기증여의 전형이 되기 위해서는 ‘한 분이시고 언제나 충실하시며 생명이신’ 하느님의 사랑이 그들 사랑의 척도가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부부사랑의 고유한 특징은 첫째, 오직 서로에게만 유보된 방식으로 자신을 내어주며 사랑해야 할 배타성입니다. 부부의 ‘한 몸’은 섹슈얼리티를 통한 전적인 자기증여(선물)를 통해 자기 자신과 부부애로서 사랑이 증여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공적 약속입니다. ‘너만을 영원히’라는 배타적이고 전적인 증여의 약속은 언제나 공적인 인정을 필요로 하며, 그 약속은 이제 그들이 함께 살아가게 될 구체적인 삶의 방식을 규정합니다. 부부는 공동의 운명, 공동의 미래, 공동의 시간, 공동의 행복에 참여하는 ‘상호적인 우리’가 됩니다.
셋째는 충실성입니다. 혼인 서약의 대상은 ‘어떤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을 내어 준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약속은 서로의 한 순간만을 채우겠다는 것도, 특정한 기간만을 의미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인간적 허약함이나 문화의 유약함도 인간 사랑에서 ‘영원히’라는 본성적 특질을 떼어놓지 못합니다. 사랑은 무한에까지 뻗어가는 갈망이기에, 충실성은 언재나 사랑의 본질에 속합니다.
넷째는 생명출산능력입니다. 성은 본질적으로 내재적 출산 기능(생식력)을 내포합니다. 남녀의 성적 상이성은 두 사람이 새로운 생명에 열려 있음으로써 그들이 그저 자신들 안에 갇혀 있지 않고 새로운 생명 출산을 통해 더욱 확장되며 미래를 향해 열리게 해 줍니다. 사랑과 생명을 분리할 때 우리는 자기증여를 축소하게 됩니다. 부모됨은 자기증여의 확장을 통해 서로가 상대방에게 선사하는 선물입니다.
이와 같이 배타적이고 공적이며 충실하고 열매 맺는 사랑은 혼인성소와 수도성소, 사제성소 안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야 할 ‘자기 증여의 혼인적 사랑’입니다. 혼인과 독신 둘 모두 혼인적으로, 곧 자기 자신을 전적인 선물로 줌으로써 남녀의 몸에 새겨진 사랑의 본성인 ‘몸의 혼인적 의미’를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톨릭 성교육 틴스타는 남녀 성적 상이성을 하느님의 모상됨을 드러내는 자리로, 각자의 신분(성소) 안에서 자기증여의 혼인적 사랑을 살아가도록 촉진합니다.